명성황후와 대한제국
"며느리와 시아버지와의 싸움' 이라는 구도 아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대원군의 의도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많은 부분 편향된 시각을 지니고 있다. 한 나라의 왕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살해당한 이 황당한 사건을, 일개 개인의 권력욕 혹은 무력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의 중심에 섰다 맞이한 비참한 여인의 최후 등으로 단정하는 것은 커다란 역사 줄기의 한 단면만을 본 것이다.
이 책은 숨겨진 역사의 짧은 기간. 하지만 근대화의 시기에서 가장 숨가쁘고 힘들었던 시기인 을미지변(乙未之變;저자 한영우는 을미사변이라는 용어 대신에 을미지변을 골랐다.)으로부터 대한제국 성립시기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한다. 저자는 명성황후 시해의 배경과 황후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영향을 재조명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개화'도 '척사'도 아닌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선택하였고, 이런 왕실의 정책노선은 한국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야심에 큰 방해물이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변고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 가장 걸림돌이 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권력에서 밀어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 이는 황후가 시해된 직후, 일본의 뒷받침을 통해 세워진 김홍집 내각이 고종을 경복궁에 유폐시키고, 황후의 죽음을 알리기보다는 서인으로 폐출시키려는 갖가지 모략정책을 내세운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유폐되었던 고종이 친위 세력에 의해 가까스로 궁을 탈출, 러시아 공사관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권력을 잡자 일본 군대가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무력시위를 한 것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일이다.
황후를 잃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던 고종과 태자는 이후 '자주독립'을 열망하게 되었고, '대한제국'의 성립을 위해 권력을 모아간다. 그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국장은 다섯 차례나 연기되었다. 명성황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애쓴 고종의 의지때문이었다.
한말의 상황을 '무력한 정권과 부패한 관리들로 인한' 이라는 기존 시각을 벗고, 저자는 조선 말 왕실의 자주를 향한 노력을 주목한다. 저자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까닭, 그 이후로 거행된 친일내각의 정책 등을 엄밀하게 살펴보면서 당시 왕실이 세간에 널리 인식된 것처럼 피동적이기 보다 자주독립국가를 향해 능동적으로 움직였음을 확인한다."